정선군은
철기문화가 기반이 된 초기국가 시기 예맥(濊貊)의 땅이었고, 삼국시대(三國時代)에는 고구려 땅에 속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기록은 “강원도는 본래 예맥(濊貊)의 땅인데 후에 고구려의 소유로 되었다”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서 찾을 수 있다.
이후 이 지역은 한강 유역을 확보하려는 고구려와 신라의 밀고 밀리는 접전으로 점령 세력의 군사적 요충지가 되기도 했으며, 미천왕(美川王) 때 고구려의 속현이 되었다. 장수왕(長壽王)이 427년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고 남하정책을 강하게 펴면서 죽령(竹嶺) 이북까지 영토를 확장해 충주고구려비를 세울 무렵 정선지역은 고구려의 행정구역에 속해 잉매현(仍買縣)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하고 당나라를 축출하여 삼국통일을 이룩한 뒤인 757년(경덕왕 16) 국토의 원활한 통치를 위해 행정구역을 개편했다. 이때부터 잉매현(仍買縣)은 정선현(旌善縣)으로 이름이 바뀌어 명주(溟州)의 속현이 되었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 1018년(고려 현종 9) 정선현으로 유지되다가 이후 정선군(旌善郡)으로 승격되었다. 고려가 원나라의 지배를 받던 1291년(고려 충렬왕 17)에는 도원(桃原)으로 개칭되었고, 1310년(고려 충선왕 2)에는 심봉(沈鳳)으로, 그리고 1353년(고려 공민왕 2)에 다시 정선으로 환원되었다.
정선은
태백산맥이 북에서 남으로 뻗어가면서 강원도에 이르러 영동과 영서의 분수령(分水嶺)을 형성하였는데, 영서에 위치한 이 고장은 이 산맥의 정기와 기세를 다 쏟아 놓았는지 웅장한 산악과 청정한 강물이 서로 안고 돌아가는 구곡양장(九曲羊腸)을 이루고 있다. 또한 상원산, 갈왕산(가리왕산), 비봉산, 벽파령, 성마령, 마전치(비행기재) 등은 군역(郡域)의 우벽(右壁)이다.
고양산은 군내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임계면, 여량면, 정선읍, 화암면의 일부를 형성하였으며, 갈래산은 동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려오는 사이에 우암산(牛岩山), 서운산(瑞雲山), 기우산(물비리산)을 이루고 조양산(朝陽山), 병방산(兵防山)을 끝으로 마치었다. 이 산맥의 북쪽은 화암면, 정선읍의 일부가 되고 남쪽은 남면의 북반(北半)을 이루었으며 함백산(咸白山)이 서쪽으로 뻗어 영월로 가는 중간에 백운산, 두위봉, 죽겸산 등이 있는데 그 북쪽은 남면의 반역(半域)을 이루었고 그 남쪽은 신동읍을 형성하였다.
하천은 남한강 상류라 총칭하는 바 오대천은 오대산에서 원류하고 임계천은 삼척 중봉산, 석병산에서 발원하며 송천강은 발왕산에서 시원하여 여량면 여량리에서 임계천(골치천)과 합류하여 「아우라지」를 이루어 아래로 흘러내리다가 남평리에서 오대천과 합류한다. 정선읍 앞에 이르러 화암면 백전리 한리소(汗里沼)에서 원류하는 동천과 합류하니 조양강(구명 동강)이라 칭하며 용탄과 광하리를 돌아 가수리에서 남천(고한 갈래산에서 발원하여 남면을 관류)과 합류하여 유유히 하류하는 중간에는 기암절벽(奇巖絶壁)의 장관(壯觀)을 이룬다.
또한 산수가 장엄(壯嚴)하고 수려(秀麗)하여 예부터 무릉도원(武陵挑源)이라고 불렸으며, 깨끗하고 깊은 곳이어서 신선이 살았다는 구산(九山), 오수(五水)가 서로 조화를 이루어 곳곳에 동굴, 약수 등 경치가 빼어났다.
뗏목 위에서 관망하면 내금강, 해금강 같은 경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길게 흘러 충청, 경기, 서울을 지나서 멀리 서해로 흘러 들어간다. 또한 강천(江川) 유역에는 식수, 물고기, 농업용수, 물레방아, 배나들이, 떼목 등이 있는데 이런 천혜의 혜택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따라서 본 군은 비록 평야는 많지 않으나 산이 높고 물이 깊고 산간 구렁턱 산림이 울창하고 약초가 많다. 지하자원으로 금, 은, 동, 철, 석탄, 석회석, 기타의 광물자원이 풍부하여 화암면 일대에는 금광석으로 이름났으며, 특히 무연탄이 많아 1950~1955까지 고한읍, 사북읍, 신동읍 내 광업소 등지에서 생산되는 석탄은 국내 연료 수요의 대부분을 공급했던 보고이나, 1996년도부터 「석탄광업합리화」 정부 시책에 따라 폐광조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