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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찬 아침 평온한 저녁 행복한 정선 정선군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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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면

남면의 전설

장지온(壯志溫)의 예지도적래(豫知盜賊來)

옛날 남면 무릉리에 학문과 덕행을 겸비하여 인근 주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아온 장지온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일찍이 도를 깨우쳐서 앉아서도 원근의 일을 다 알고 앞날에 닥쳐 올 일들을 예언하여 주위 사람들을 감탄케 하였다.
하루는 문득 군수에게 “집에 도적들의 화가 미칠 것 같아 잠시 다녀와야 겠소”하면서 그 길로 떠나 혼자 걸어서 남면 무릉리에 있는 본가까지 50여 리 길을 걸어서 당도하니 시간은 초경 무렵이었다.
가족과 집안 사람들은 아무 예고도 없이 주인이 갑작스레 돌아왔으므로 어인일로 이렇게 밤길을 급히 오셨습니까하니 오늘 저녁 녹림객이 내 집에 몰려올 것 같으니 술과 음식을 많이 장만하라고 일렀다.
가족들은 의아해 하면서도 부지런히 음식 준비를 하였다. 그런지 얼마 안 되어 과연 10명의 도적떼가 들이닥쳐 재물을 마구 약탈하려 하였다. 그러나 주인은 태연하게 도적들을 불러 앉히고 마련하였던 음식으로 후대하였더니 도적들은 원체 굶주린 터였으므로 도적질 할 것도 잠시 잊고 배불리 먹고 술이 취하였을 때
"내 이미 그대들이 올 것을 알고 일부러 읍에서 예까지 나와 이같이 대접하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간의 일을 회개하고 각자 향리에 돌아가 양심을 바로 가지고 가족들과 함께 열심히 일하면 어찌 호구지책이 없겠느냐. 하루속히 죄를 뉘우치고 양민으로 돌아가 마음 편히 살아라” 하고 타이르니 도적들 중에는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고 입을 모아 하나같이 “어른께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흉년을 만나 기근을 참지 못하여 이 지경이 되었으나 이제 어르신네의 말씀을 듣고 진심으로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하며 엎드려 사죄하였다. 주인은 다시 이들에게 엽전 백 냥씩을 나누어주며 “비록 많은 돈은 아니나 이를 생업의 밑천으로 하여 착실히 살도록 노력하라“ 하니 도적들은 더욱 감격하여 백배 사례하고 각자 흩어져 돌아갔으며 그 후 한동안 인근에는 도적의 무리가 없어졌다.

(『정선의 향사』, 정선군, 2000, p.173)

학(鶴)이 날아가버린 각씨(閣氏) 바위 이야기

남면 낙동 지방에는 크고 작은 바위가 많이 있는데 바위의 형국은 특징이 있어 이름이 붙여져 있는데 마을 중앙의 학바위를 중심으로 주변에 신랑암, 신부암, 시비암 등이 있다.
옛날 이 마을에는 생활이 매우 어려워 아주 가난하게 살던 사람이 있었는데 어찌나 빈곤한지 평생소원이 한번 남부럽지 않게 잘 살아 보는 것이 한인데 하루는 이곳에 찾아온 도승에게 부자가 될 집 터 한자리만 보아줄 것을 간청하였더니 이윽고 도승은 30여 평 남짓한 집터를 정해주며 “ 여기다 집을 짓되 이 부근에 있는 바위는 여하한 일이 있어도 절대 움직이지 말라” 고 당부하고 도승은 사라졌다.
그는 도승이 일러준 대로 그 자리에 아담한 집을 짓고 5,6년 살자 과연 남부럽지 않게 가정이 부유해지고 생활에 여유가 생기자 이는 이제까지 자기가 살던 집이 비좁은 생각이 들어 좀 더 확장하고자 하였으니 집 옆에 바위가 있어 증축에 방해가 되었다. 그는 집터를 잡아줄 때 도승이 이야기한 바위를 움직이지 말라는 철석같은 당부를 감쪽같이 잊어버리고 바위를 약간 들어 옆으로 옮기려 하자 바위 밑에서 백학 한 쌍이 길게 슬피 울며 날아올라 각씨바위 위에 올라가 앉으므로 깜짝 놀라 바위 옮기기를 중단하였다.
그 후부터는 이의 살림살이는 다시 빈곤해졌으며 학 한 쌍 중 한 마리는 신랑암에 앉아 각씨바위에 앉은 학을 끔찍이 사랑하며 먹이를 날라다 주는 등 정성을 다하였으므로 각씨바위라고 불려지게 되었다고 전한다.

(『정선의 향사』, 정선군, 2000, p.174)

불표자의 말로

고려 말엽 남면 어느 마을에 편모 슬하에 독자가 있었다. 이는 어찌나 불효하였던지 평상시에 어머니를 봉양치 않음은 물론 수년간 어머니가 병상에서 신음하여 도박과 주색잡기에 정신을 빼앗겨 타지방을 전전하면서 소식조차 없었다. 그 어머니는 급기야 자식을 원망하며 병사하고 말았다.
얼마 후 이 불효자가 마을에 다시 돌아 왔으나 온 마을 사람들은 이런 자를 마을에 두었다가는 온 마을의 수치 일 뿐 아니라 자칫 잘못하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못된 본보기가 될 것이라고 동네 사람들이 모여 의논하고 마을을 쫓아냈다. 마을에서 쫓겨난 이는 갈 곳이 없어 사방으로 유랑하다가 태백산 어느 암자를 찾아와 주지에게 수도할 것을 며칠을 걸쳐 애원한 끝에 주지는 그에게도 기거토록 승낙하였다.
이후 주지는 두 장정에 대해 자세히 관찰하여 보니 나중에 찾아온 장정은 참으로 과거 자기가 도둑질하면서 생활하던 것을 뉘우치고 오직 수도에만 열중하였으나 이 불효자는 전혀 회개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이것을 본 주지는 이를 징벌하기 위해 하루는 두 사람을 한자리에 앉혀놓고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내게는 딸자식이 하나 있는데 나는 사정이 있어 이 암자를 떠나야 하겠는데 너희 두 사람 중 한사람은 내 딸과 혼인하여 이 암자에서 살고 한 사람은 나를 따라 다른 사찰에 가서 수도를 계속하자”고 말하니 장정은 주지를 따라갈 것을 간청하였으나, 불효자는 미모의 딸에게 혹하여 주지에게 결혼을 시켜줄 것을 간청하였다. 이에 주지승은 두말없이 허락하고 그 날로 장정을 데리고 훌쩍 암자를 떠나 버렸다. 한참 길을 가던 주지는 장정에게 “내가 깜빡 잊고 염주를 절에 두고 왔으니 네가 속히 암자에 돌아가 찾아 가지고 오너라” 하였다. 장정은 즉시 “네”하고 급히 달려서 암자에 도착했으나 이게 어찌된 일인가?
처녀는 간 곳 없고 여산대호가 불효자를 죽여 포식하고 있지 않은가. 깜짝 놀란 장정은 황급한 마음으로 가까스로 스승의 염주를 찾아 가지고 돌아가 스님에게 “스님 큰일 났습니다. 그자는 호환을 당하였고 따님도 필경 변을 당한 것 같습니다.”하니 주지는 이미 사실을 알고 있는 듯 태연한 자세로 “인생은 가련하나 불효자의 소행이 괘씸할 뿐 아니라 지은 죄를 전혀 뉘우치지 못하고 오히려 탐욕을 일삼으니 인과응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잊어버리고 가자” “따님은 어찌 되었습니까” “실은 내게 딸이 있을 리 없다. 너희를 시험코자 호랑이를 딸로 둔갑을 시켰다”고 하며 묵묵히 앞서 걸어갔다.
장정은 더욱 주지를 보기 송구하고 크게 깨달은 바 있어 스승의 가르침을 잘 받고 열심히 수도하여 후일 훌륭한 승이 되었다고 전한다.

농부와 곰 이야기

지금으로부터 약 150여 년 전 남면 무릉리에 이씨라는 농부가 살고 있었다.
이 농부의 집에서는 한우 세 마리를 사육하고 있었는데 소먹이를 담아주는 여물통이 작아서 소먹이를 담아 줄 수가 없어 이를 구하기 위해 하루는 지게에 점심을 싸서 매어달고 도사곡(사북읍 사북 4리에 있음)으로 목적지를 정하고 풀이 키를 넘는 숲을 헤치며 큰 나무를 찾기 위해 산으로 오르던 중 이 산 중턱에서 큰 나무를 찾았는데 밑 둘레가 한아름 정도 되는 것을 베어 여물통을 거의 완성할 무렵 우연히 산 아래 계곡을 내려다보니 큰 어미곰 한 마리가 새끼곰 두 마리를 데리고 지장천에서 가제를 잡아먹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농부는 그만 벌컥 소리를 쳤더니 큰 바위를 들던 어미곰은 깜짝 놀라 양손으로 잡았던 바위를 놓고 사방을 살펴보았으나 사람은 발견하지 못하자 다시 바위를 일구어 보니 새끼 두 마리가 바위 밑에 깔려죽어 있었다.
어미곰은 바위를 제쳐놓고 죽은 새끼곰을 바위 위에 세웠다.
죽은 새끼곰을 세워 놓으니 쓰러지고 쓰러지니 어미곰이 다시 세워 놓고 이러기를 수십 번 계속하자 이것을 보고 있던 농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웃고 말았다.
웃음소리를 들은 어미곰은 화가 나 번개같이 달려와 농부를 물고 핥자 농부는 기절하였다. 얼마 후 정신을 차리고 도망하여 간신히 집으로 돌아와 보니 좌측 눈과 얼굴엔 살이 떨어져 나갔다.
그 후 농부는 갖은 약을 다서서 상처가 완전히 낳은 다음 타 지역으로 외출을 할 때면 동네 아이들이 떼를 지어 따라 다니며 저기 저 곰한테 핥리기 당한 영감이 오신다고 놀려대므로 이후부터 이 농부는 문밖출입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구만 묵밭

옛날 백이산에 이구만 이라는 장사가 묵밭(묵은 밭)을 갈아먹고 살고 있었다. 그런데 묵밭 옆에는 장사샘 이라는 것이 있어 이 물을 마시면 힘이 점점 세어졌다고 한다. 이구만은 또한 도둑으로 전한다.
옛날에는 유평리와 그 밖의 지역에서 낙동이나 광덕으로 시집을 오게 되면 지금의 유평리 새마을을 지났는데 이구만은 이곳을 지키고 있다가 가마만 지나가면 가마와 음식을 탈취해 가곤 했다고 한다.
이구만의 죽음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으나 그가 죽을 때 장수샘의 물을 다른 사람이 마시지 못하도록 커다란 솥뚜껑으로 덮고 말았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가끔씩 그 솥뚜껑 속에 있는 표주박이 솥뚜껑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지금도 백이산에 가면 이구만묵밭 이라는 꽤 넓은 곳이 있다.

(『정선의 향사』, 정선군, 2000, p.174)

감로수(용궁수)

감로수는 문곡 2리 고무골에 위치한 자문사에 있는 샘이다. 이곳에는 본래 샘이 없었으나 옛날 한 여인이 천일기도를 마치자 앉았던 곳에 샘이 솟아났다고 한다. 그 이후부터 이 샘물은 부정한 일을 저질렀거나 언행이 좋지 않은 사람이 마시면 한 달 또는 보름, 열흘씩 샘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특히 이 샘의 물은 위장병과 이질 등에 특효가 있었다고 한다.

할미소 전설

유평2리 고병계곡에 할미소라는 소가 있다.
계곡 위쪽의 버드내에 한 노총각이 그 어미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멀리 떨어진 동내에 사는 한 처녀와 어렵사리 혼사가 이루어져 장가를 가게 되었다. 드디어 장가가는 날. 3일후에 온다며 떠난 아들이 돌아오지 않자 손꼽아 기다리던 노파는 아들을 찾아 길을 떠나 이곳에 다다랐으나 그만 발을 헛디뎌 빠져 죽고 말았다. 죽을 할미의 눈물이 소를 이루었다하여 ‘할미소'라고 했다고 한다.

사다리소

옛날 고병계곡에 사는 한 여인이 아이를 잃어버렸다. 그러자 하루 종일 잃어버린 아이를 찾으러 울면서 계곡으로 찾아 헤매다가 폭포와 소가 앞을 가로막고 있어 지쳐서 잠이 들어버렸다. 그때 꿈속에서 물줄기가 사다리로 바뀌는 꿈을 꾸었다. 놀라서 깨어보니 그 벼랑 앞에 나무사다리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 여인은 너무나 고마워 세 번 절한 후 이것을 타고 올라갔다. 그런데 잃어버려 찾고 있던 아이가 호랑이 새끼와 놀고 있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이를 무사히 구해 내려온 여인이 뒤를 돌아보니 사다리는 온데 간 데 없고 폭포 물길만 물안개에 자욱했다. 그때부터 무사히 아이를 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소를 향해 떨어지는 물줄기가 마치 사다리 같다고 해 ‘사다리소'라고 한다.

용소

고병계곡에서 가장 웅장하고 깊은 소로서 동네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병주실 한 타래가 다 들어가도 모자랄 만큼 깊다고 하며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온다.
인근 마을에 매년 가뭄이 들어 기우제를 지내도 소용이 없었는데 동네를 지나가던 한 노승이 ‘술을 빚어 용에게 마시게 하라'고 말하고 홀연히 사라지자 사람들이 열 가지 곡식으로 술 열 말을 정성껏 빚어 이 소에 사는 용에게 갖다 바치니 술을 먹는 용이 취하여 비를 내리게 하였으며 이때부터 이 소를 '용소' 라 하게 되었다고 한다.
다른 한 가지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옛날 인근 마을에 매년 가뭄이 들어 기우제를 지냈으나 소용이 없었다. 하루는 동네 사람들 꿈에 ‘개를 잡아 소에게 넣으라'는 계시가 있어 개를 잡아 이 소를 넣었더니 용이 더럽다고 물을 토하며 승천하였다. 이 때 용이 토한 물이 비가 되어 3일 동안 내리자 가뭄이 해소되고 풍년이 들었다고 한다.

담당부서 : 남면
연락처 : 033-560-2796
최종수정일 : 2017-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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