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을 빛낸 인물을 소개해 드립니다
천혜의 자원과 전통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정선에 뿌리를 두고 정선을 빛낸 인물들에 대해 자세히 알려드립니다
이규복(李圭復) 선생은 서기 1707년 정선군 여량면 송석동에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경주(慶州)이씨 자는 백근(伯謹)이고 호(號)는 송석와(松石窩)이다.
성품이 인자하고 강직하였으며 어릴때부터 성현(聖賢)의 학문에 열중하였다.
그는 일찍이 가세(家勢)가 빈곤하여 산에 나무를 하러 다녔는데 다른 사람은 하루에 네 짐씩 나무를 해 왔으나 이규복은 두짐밖에 하지 못하므로 그 늦어진 까닭을 물은즉 〔"생나무는 몇 개를 베어 보아도 진(樹脂)이 나오므로 내 살을 베면 아파서 못 견디는데 초목(草木)인들 오죽 아프겠는가? 그래서 죽은 나무만을 주워오느라 늦었다."〕고 대답 하니 사람들이 그의 사람됨에 감격을 금치 못하였다. 〔"인간의 생명이 귀중한 것 처럼 비록 한그루의 나무라도 그 생명의 존중함은 자연의 이치요 신비가 아닐까요?"〕하였다 한다.
그후 이규복은 서당(書堂)에 입학 하였는데 하나를 가르치면 열까지 아는 수재였다. 어느해 한여름 무더운날 서당 선생이 생도를 데리고 시원한 정자(亭子)나무 그늘에서 책을 읽게 하였는데 유독 이규복은 뜨거운 햇볕에 나가서 책을 읽고 있어 〔"규복아 너는 어찌하여 시원한 곳에서 책을 읽지않고 뜨거운 햇빛 아래서 책을 읽느냐?〕하며 물으니 〔"지금 내부모님은 뙤약볕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농사를 지으시는데 어찌 공부하는 제가 시원한 그늘에서 책을 읽을 수가 있겠습니까?"〕하고 대답하였다.
그는 워낙 가정이 찢어지게 가난하여 글씨 연습할 종이와 붓 그리고 먹조차 없었으나 불평한마디 하지 않고 가랑잎과 숯검정 물로 글쓰는 연습을 하였다 한다.
송석(松石)은 나이 20세가 되던해 멀리 도암(陶庵) 이재선생의 문화생으로 가르침을 받았다. 도암선생이 이규복의 사람됨을 알고 사랑하며 성심으로 지도하니 학문이 날로 발전하여 마침내 도학(道學)에 통달 하였다.
규복은 일생동안 학문탐구와 성현을 숭배하고 후세교육에 전념한 유현(儒賢)이며 청빈 중에서도 청송(靑松)의 고결을 고수한 도학자 이거늘 당시의 국가제도는 미천한 자는 출세할 길이 없고 더욱이 벽강궁협(僻彊窮峽)에서는 보옥이 곤강(崑崗)에서 들어날 수 없었던 것이며 선생 또는 미천한 신분을 고수 하기를 삼대판하군역자(三代板下軍役子)요 일우정선교교생신(一隅旌善校生身)이란 문구를 지팡이에 새겨서 그 신분을 표하였다 하니 보통사람으로는 행동하기 어려운 소신이며 도인의 진심이다.
워낙 도덕과 덕행이 높았으므로 멀리 충청도 경상도에서 수학을 받으러 왕래가 끊이지 않았고 명성이 멀리에까지 전파되어 현재에도 과객이 이규복 선생의 행적을 탐문하는 자가 많다.
그가 남긴 유시에는
만초천화편입망(萬草千花遍入茫)하니 혹홍혹백혹청황(或紅惑白或靑黃)이라 천년물성수능탈(天然物性誰能奪)고 일리추래정묘망(一理推來正杳茫)이라 하였다.
이 시는 선생의 미천함을 멸시하는 동창들에게 게시한 시이다.
이규복 선생에 대한 일화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그의 효성은 지극했다. 어느해 그의 부친 병환이 위급하여 사방에서 약을 구해다드려도 백약(百藥)이 무효이고 치료 방법은 단 하나뿐 산돼지(豚)의 피가 특효약이라 하여 산돼지를 잡으로 산에 오르던중 때마침 돼지 여러마리가 나타나므로 『"여봐라 우리 부친의 병환이 위중하여 너희들 피를 구하러 왔노라"』하니 그중 한 마리가 그의 정성에 감동하여 스스로 땅에 엎드려 채혈 하기를 원하니 그 피를 얻어다가 아버지의 병환을 완치 하였으며, 또한 그가 도인(道人)이라고 인근에 소문이 퍼지자 이 말을 전하여 들은 불량배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가를 시험하기 위해 그가 마을을 지날 때 길가에 엽전 한 꾸러미를 흘려놓고 길옆에 숨어서 망을 보자 이윽고 선생은 돈이 흩어진 자리에 이르러 깜짝 놀란 듯 주위를 두루 살펴본 후 엽전을 주워 모으기 시작하였다. 불량배는 옳지 그러면 그렇지 제가 돈앞에서 별수 있으랴? 돈에 대한 욕심은 누구나 다 마찬가지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흩어진 엽전을 말끔히 주워 모아서 길옆 바위 위에 올려놓고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이 불량배는 감탄(感歎)하여 자신의 못난행동을 뉘우치고 뛰어나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깊이 사죄하고 그후부터 불량배는 착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이규복 선생은 한때 생활이 몹시 빈궁하여 경상도 지방으로 조리장사를 다녔다. 어느 민가(民家)에서 하룻밤을 쉬게 되었는데 주인은 그의 행색으로 보아 하찮은 장사치로 여기고 하인(下人)들 방에서 함께 자도록 하였다.
하인들은 행색이 초라한 장사치면서도 남루한 양반옷을 입었으므로 비꼬는 말로 『"여보게 뭐 이따위 꼴같지 않은 초립동이 양반이 다 있느냐?"』 하니 『"영남(嶺南)에서는 송아지 한필로 양반을 산다 하더니 과연 그말이 틀림없구나."』대답하였다. 그 말을 전해들은 주인은 크게 뉘우친 바 있어 『"제가 양반을 몰라보고 욕되게 하여 미안합니다. 선생과 같은 청렴한 선비를 우리집에 손님으로 맞게되어 영광입니다."』하며 각별히 접대 하면서 며칠을 쉬다가게 하였다.
이규복은 유년(幼年)시 강에 나가 낚시를 즐겨 하였다. 그러나 고기를 잡아서 놓아주고 또 낚아서 놓아주곤 하였다.
이를 지켜보던 주위 사람들은 『"너는 왜 애쓰고 낚아올린 고기를 도로 놓아 주느냐?"』한 즉 『"고기를 낚는 것은 낚시하는 재미인데 고기를 낚시로 즐겼으니 그만하면 족하지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물고기도 산 생명인데 놓아줌이 당연하지 않느냐."』 하며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부인은 평소 가난한 살림과 남편의 무능(無能)을 불평하며 지냈다.
하루는 그와 동문수학 하던 사람이 삼척(三陟)부사로 부임하러 가던중 그의 집에 들려 하루밤을 새우며 정담(情談)을 나누었는데 그 부인이 가만히 엿들은 즉 자기 남편이 삼척부사보다 월등한 식견(識見)을 가졌음을 알고 평소 가난한 살림을 불평한 일을 후회하고 남편을 존경하게 되었으며, 그후 친구인 삼척부사의 청에 못이겨 잠시 부름을 받아 부사의 책방일을 맡았는데 불과 한달이 못되어 작별하자 부사는 놀라며 못가게 만류하자 이규복은 『"잘 먹지도 못하던 사람이 별미와 술과 고기를 먹으니 위장에 해롭고 또한 고향 사람들이 찾아와 불의(不義)의 청을 하니 심신이 괴로워 더 이상 체류할 수가 없다."』하며 굳이 작별하니 부사는 새삼 감탄하며 후사(厚謝)하고 귀향시켰다.
어느해 이규복은 스승이신 도암선생이 별세 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조문을 가려하니 워낙 생활의 여유가 없어 아무것도 준비하여 가지고 갈 수 없는 형편이므로 빈손으로 가기가 민망하여 모밀떡을 한시루해 지고 길을 떠났다. 그러나 막상 당도하여 보니 서울에서 잘사는 양반들과 평소 그의 학식을 은근히 시기하던 무리들이 모여 『"고인에게 이런 무례(無禮)가 있을수 있느냐?"』하며 조문도 못하게 하고 쫓아냈다. 이규복 선생은 『"그러면 밖에 있다가 스승의 상여나 망매(望拜)하겠다."』하고 집부근 도로변에서 밤을 새우며 발인(發靷)할때만 기다렸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상여를 운구하려 하나 상여가 움직이지 않으므로 상주를 비롯하여 장례식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당황하여 서로 의논한 바 이는 분명히 송석 이규복을 괄시하여 문상도 못하게 한 때문이라 깨닫고 그를 찾았더니 그는 담넘어 길가에서 엎드려 밤을 새웠으므로 등에 서리가 덮혀 있었다. 상주와 그를 시기하던 무리들은 이규복을 데리고 들어가 문상케 하고 등에 지고 있던 떡을 펴보니 떡은 새로 한것처럼 김이 무럭무럭 났다. .
이규복은 상여앞에 분향재배 하니 숙연하기 이를데 없고 잔을 올리니 술잔이 마르며 수저 소리가 났으며 송석이 문상을 마치자 비로서 상여가 땅에서 떨어져 운구가 가능했다고 한다.